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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여명 일본사 일본사 도입부 내용입니다. 인류의 등장과 일본열도,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것은 일본의 여명 일본사 지금으로부터 약 400만년전에 아프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략적으로 구분한다고 하면 원숭이, 원시인, 신인, 현대인 식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까지나 기준이며 어느날 갑자기 신인이 옛날사람이 된것은 아니며 시험에서 사용하는 용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쓰지는 않겠습니다.인류등장시대는 지질학에서 말하는 제3기 말기라는 구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4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을 기점으로 창세기 전 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있었는지 그 수수께기를 풀기 일본의 여명 일본사 위해서는 인골 화석이 얼마나 오래된 지층에서 나온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일본 토양은 산성이 강하여 뼈가 .. 2017. 8. 3.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3 정약용에 대한 내용 3번째 입니다. 그는 권력이 집중되었던 관료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3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는데 방안으로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중추부를 실직화시켜 변무만을 담당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동시에 이전까지 비변사가 장악했던 군국기무 처리 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키고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하여 의정부가 명실공히 최고의 관료기구의 중심에 서게 되는 행정체계를 구상하여였습니다. 그는 그리고 왕과 관료집단 간의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고자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3 운영하기 위하여 규장각의 초계문신을 비롯한 청요직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며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화 되어 행사되도록 하여 행정의 본체인 육조를 중심으로.. 2017. 8. 2.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2 정약용에 대한 내용 2번째입니다. 정약용 생에 세번째 단계는 유배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인데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부근에 잇는 장기로 유배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의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2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만 매진하였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잇는 기회로 활용하였는데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한 암흑기 였으나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 였으며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기간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 시대에 발생했던 윈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 2017. 8. 1.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정약용에 대한 내용 1번째 입니다. 영조38년부터 헌종2년까지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입니다.자는 미용이고 호는 다산, 사암, 여유당, 채산, 근기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정조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하여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 등 모두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평가받고 있습니다.그는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 2017. 7. 31.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적선이포구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전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는데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에 이르렀을때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으며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으며 공격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다른 작전을 구상하였으며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는데 절영도에서는 수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 2017. 7. 30.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이순신 임진왜란 당시의 내용입니다. 이날은 국기일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당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도 싸우지 않고 제해권을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2017.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