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적선이포구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전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는데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에 이르렀을때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으며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으며 공격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다른 작전을 구상하였으며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는데 절영도에서는 수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백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 한것을 알게 된 여러장수들은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려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는데 우부장 정운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떤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으며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따가 아군이 돌진하여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안 굴속에 있떤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는데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여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특히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습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우너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었으며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썻는데 1597년 명일 강화회담이 결렬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는데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가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고니시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적의 흉계인줄 알면서도 부딕이 출동하였으나 가톤느 이미 수일전 서생포에 들어온 뒤였고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 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수 없다 하였지만 전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순신만 잡았으며 그 중 경상우수사 원균은 한층 더 노골적으로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불만을 가졌는데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고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는데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는데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내보내서는 안된다는 치계를 올렸지만 모두 허사였고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것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3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냐고 하였는데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어떠한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1차 신문때에 한달여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으며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는데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추가적 신문은 받지 않게 되었으며 세상천지에 나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하라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는데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이라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