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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by 건강맨1213 2017.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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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임진왜란 당시의 내용입니다.


이날은 국기일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당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도 싸우지 않고 제해권을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장악하였으며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는데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결집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습니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대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으며 이틀뒤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달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작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척 이었는데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기를 기회를 주지 않았고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습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되었으며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으며 제1차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떤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척이 사천곤양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는데 5월 29일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으며 노량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가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서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으며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으며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인 창신도를 떠났늗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일본수군들은 성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가 조선수군을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습니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매우 반갑게 맞았으며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습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공격을 가해왔지만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고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으며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으며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며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행하였고 당항포 내만에서는 왜의 선박이 총 25척이 정박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되었는데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 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강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2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 등이 인솔한 선박이 정박하고 있었고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습니다.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총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와 아타나베를 위시하여 이름있는 자들이 전사하였으며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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