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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by 건강맨1213 2017.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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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에 대한 내용 1번째 입니다.


영조38년부터 헌종2년까지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입니다.

자는 미용이고 호는 다산, 사암, 여유당, 채산, 근기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정조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하여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 등 모두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서 국태민안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수 있었는데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안에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소싯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양근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학풍을 형성해 나갔던 곳이며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진주목사를 역임했떤 정재원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2녀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음사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가 포의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부터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는 아니었던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생에로는 첬째단계 출생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냈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는 부친인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으며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때마침 이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분에 서울에서 살게 되었는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면 이가환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했던 매부 이승환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어 그리하여 그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정액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따고 하는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데 적지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으며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었습니다.


정약용의 생에 두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으로 체포되던 때까지 들수 있는데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고 이때 대학과 중용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1789년에 마침내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이후 10년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등 기술적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시기에 그는 이벽 이승훈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정약용 조선후기의 실학자1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고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의식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고 입교 후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 문제로 되두된것은 1791년의 일인데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라쳴 시달림을 당햇는데 이때마다 자신은 천주교와 무관하다는것을 변호하였는데 1801년 천주교 교난때 유배를 당하여 중앙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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