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정치 교섭과 번주 시대에 실적등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 8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였습니다.
기슈의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스사다는 4형제로 형이 3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쇼군의 자리는 커녕 기슈의 번주 자리에서도 먼 곳에 위치한 존재였지만 맏형이 병사하고 둘째도 급사하였기 때문에 기슈 번주 상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성주가된 와카야마는 와카야마 성에서 현재의 천수각이 1958년에 재건되었으며 1850년에 재건된 것을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천수각과는 다른것입니다.
당시에 기슈도 재정적 위기가 있었는데 애도 막부와 마찬가지로 지진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복구 비용의 증가와 와카야마 성 보강 강화 비용, 세력을 늘리기 위한 실력있는 무장들의 영입하는데 따른 인건비 증가와 3대 영주 도쿠가와를 쓰나요시의 딸과 결혼시켜 생긴 막대한 결혼비용, 잇따라 사망한 2형제의 대대적인 장례비용이 그것인데 이로 인해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근검절약을 중심으로 하는 긴축재정을 실시하였으며 영주와 가신 전원이 최대한 불필요한 지출을 억제하고 화려한 복장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식사도 자재하였습니다.
불필요한 인원을 해고하고 월급을 줄였으며 토지를 개간하여 쌀 생산량을 늘리고 서민으로부터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주 취임 5년만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저축할 수 있을만큼 개혁에 성공하였는데 이 당시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고 7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구는 병에 걸려 후계자를 찾기 시작하엿는데 도쿠가와 종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인 타테바 야시 영주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이도 많고 후계자가 없었으며 혈통 측면에서 봤을때 가신이었던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치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고 있었기 때문에 쇼군으로 취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으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밀었으나 잇따라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누구인가 찾아보니 도쿠가와 요시무네였던 것으로 1716년 도쿠가와 이에스구가 죽자 제8대 쇼군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본래에는 마부와 아라이 하쿠들은 해고한채 도쿠가와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지분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시무네 단체는 막부에 있는 자들을 가신으로 삼는것이 아닌 기슈번에서 신하를 데려오는것이라 두 파벌 싸움이 예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시무네는 가신들을 줄줄이 끌어들여 오는 것이 아닌 소수 정예로만 구성하여 기존 막부 가신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부식시켜주며 주요가신들의 생활비도 넉넉하게 주어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비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일본 전국에서는 재정의 재건에 의욕적으로 임하는 영주가 많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개혁에 반대할것 같은 인간이 교섭하지 않으면 맹렬한 저항을 당하고 고립 상태가 되어 개혁을 중단하거나 은거에 몰리는 경우도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일본 전국 각지에서 바보 전이 많이 발생하는 한편, 재정 재건에 의욕적으로 임하는 영주도 많이 나오고있었습니다. 동안은 지금 봐도 좀처럼 말이있는 것도 있습니다 만 반대 할 것 같은 인간으로 교섭하지 않으면 맹렬한 저항을 당하고 고립 무원 상태가되어 개혁을 중단하거나 자칫 하면 은거에 몰리는 경우도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정치감각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는데 반대를 당하지 않도록 미리 포섭을 하였으며 아라이 하쿠세키가 추대하고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정치고문으로 화약한 주자학자가 주산비책이라는 책에 남긴것에 따르면 지금 막부의 수입은 얼마인가라고 추궁하였을때 그들은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것이 본인들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쇼군 옹립의 공이 있어 해임하지는 않겠다고 하였지만 무능하다고 지적하여 그들을 속박하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소바 요닌 제도는 그만두면서도 기슈번에서 데리고온 아리마와 카노 2명의 가신을 옆에 두어 대행에 임명하고 쇼군의 측근으로 활약하는 직책을 주면서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환대하였지만 활약의 말기에는 고작 1만석의 영주가 된 정도 였는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자신의 의사가 조직에 골고루 퍼질수 있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활용하였는데 노중과 정책을 협의하기전에 다른 사람들과 정책 협의를 하고 쇼군의 의사와 담당 판사와 관리사이에서 정책을 결정하며 쇼군과 노중 정책협의에 들어갔습니다.
노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는 막부의 결정에 의거한 노중을 존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능함을 드러내어 조용히 받아들일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발굴한 인재들의 등용도 점점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먼저 쇼군으로 취임하면서 오오를 에도의 마치봉행에 등용하는데 그가 그 유명한 오오카 에치젠인데 요시무네에 의한 교호 개혁의 중심인물로 다양한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면서 우수한 관료로 도매상-중개-유통의 물류 조직을 구축하는데에 따른 원활한 유통기구의 설립과 정비 등을 통해 이로하 47조라는 화폐관련 법을 만들어 시민 생활의 안정과 관련하여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