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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쿠샤인의 반란

by 건강맨1213 2017.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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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뒤를 이은것은 아들 도쿠가와 이에쓰나였는데 당시 11세에 불과한 나이로 이에미쓰 본인이 48살에 죽어버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가 38세에 첩에서 나온 아이가 이에쓰나 였습니다.

어린나이로 쇼군이 즉위하자 권력투쟁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었고 히데타다, 이에미스 시대에 중신이었던 자들이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에미쓰가 사망한지 3개월 후 막부 전복 계획을 밝혔는데 현재의 시즈오카 마을에 방화를 일으키고 성에서 무기를 빼앗아 구노잔에 주둔하는 한편 혼란을 틈타 막부를 전복할 계획이었는데 다행히 밀고자가 있어 막부 전복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원래부터 성공가능 여부는 알수 없었지만 막부에 미치는 영향은 컸습니다.

영주의 권력을 더욱 줄이기 위해 기존에는 영주가 사망했으때 즉시 양자를 들이는 것을 허용했었습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50세 미만의 영주가 위독할때 막판에 서둘러 입양을 허용한 것인데 이에스나는 쇼군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이에미쓰의 중신인 마스다이라 노부스나, 사카이 다카스, 아베, 호시나 마사유키로 이루어지는 지도 체제였는데 그마저도 오래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1657년 에도 건축물의 60%가 소실하는 메이레키 대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에도는 목조 건물이 밀집해 있어 불길이 순식간에 타 올랐는데 관동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오사카성의 천수각도 이때 소실되어 쓸데없는 지출은 피해야 한다는 호시나 마사유키의 의견에 따라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에도의 주요 도로의 획과 폭을 확장하여 쉽게 불이 붙지 않도록 개조하였는데 목조가옥이 밀집해 있는 상태에서는 어느 한곳에 불이 나버리면 순식간에 다른 집으로 번져버리기 때문에 에도 화재 대책은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전국시대의 분위기에서 변하여 충의가 중요시 되기 시작하였는데 주인이 죽자 충신도 따라 죽는 순사라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막부내에서도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죽을때 홋타와 아베 두명의 충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하여 1663년에는 순국 금지령이 나와 유능한 인재를 어이 없이 잃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미쓰 시대에 중국 명나라 왕조가 이자성이라는 농민에 의한 바란으로 멸망하였는데 동북부에서 성장한 여진족이 성장하여 청나라로 이름짓고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막부는 명나라 부흥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정성공이라는 인물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였는데 막부 내에서도 상당히 심각하게 출병 검토를 하였지만 결국 정성공의 거점인 복주성 함락 소식이 들려오면서 정성공이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원군을 무시하였습니다.


장사지행제라는 영지와 연공 미지급이 아닌 교역 권한을 지행으로 하는 마츠마에 지역 특유의 급료제도가 있었는데 이 제도때문에 아이누의 각 지파가 원하는 장소에서의 교역이 어렵게 되어버려서 가까운 상대 밖에 교역할수 없어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그로인해 1699년 홋카이도 히다카의 수장인 샤쿠 샤인이 봉기하는데 발단은 어업의 권리를 둘러싼 아이누 일족과의 대립과 그것을 둘러싼 마츠마에의 오해가 서로 엉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싸움은 순식간에 커져 삿포로보다 먼 북쪽 쿠시 인근까지 번졌고 마츠마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막부에서 출전하여 2개월만에 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게릴라를 통한 산발전 전투의 장기화로 화해를 제안하고 샤쿠샤인을 유인한 잔치자리에서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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