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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1편

by 건강맨1213 2017.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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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나카무라의 백성에서 천하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가 죽음을 맞이한 후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운명이 걱정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문이었습니다.

호쿠리쿠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절친한 친구 마에다 토시이에를 도쿠가와 이에야스 견제세력으로 의자하며 이에야스와 함께 오대로 중 한명으로 임명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 유력 다이묘들과 무단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는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기 세력을 늘리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토기요마사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환하였는데 조선에서 싸우지도 않은 인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로 이루어 지는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을 주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요마사에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게 되었습니다.

이시다 미스나리는 덕망이 두꺼운 마에다 도시이에를 의지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가스 등 4인이 죽은 히데요시가 결정한 규칙을 마음대로 거역하여 힘있는 다이묘들과 혼인을 한 도쿠가와를 비난하였는데 마에다 도시이에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도쿠가와는 마에다 도시이에가 없으면 나머지 가신들은 우리를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 다이묘 7인은 쿠데타를 결심하고 이시다 미스나리를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시다 미스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상을 부탁하고 도쿠가와도 여기에서 이시다 미스나리를 죽이면 도요토미가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염두해 싸움의 중재에 나섰으며 미나리는 집정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영지인 사와산성에 은둔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른 다이묘들을 영지로 귀환시켜 자신만 히데요시가 말년을 보낸 교토의 후시미성에 쳐들어갔는데 이시다 미스나리는 이에야스 반대파 동료를 만들어 반격하였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하게 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권력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야스의 계획을 알고 있던 이시다 미스나리는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없는 지금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군을 모았는데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기 전에 도쿠가와를 무찔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후쿠이현의 오타니 요시스구에게 계획을 말했지만 너는 도쿠가와를 이길수 없다고 설득당했는데 그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관동의 240만석이라는 큰 영토를 가진 대영주였고 미나리는 19만석을 가졌지만 엄청난 영토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나리의 의지는 확고하여 이에야스 토벌을 준비하고 출전하였지만 그래도 오랜 우정에서 오타니 요시스구는 마음을 되돌려 미나리의 편에 섰으며 안코쿠지 이케이라는 승려와 협의하여 모리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여 결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츠마의 영주인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에 의해 후시미성을 지켜달라말했지만 요시히로는 한반도 정벌시 조선과 명나라 수군에 큰 타격을 주는 등 공을 세워 구이시만즈라고 하여 두려워한 맹장인데 이야에스의 편에 서달라고 하였지만 도리이 모토타다는 자신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생각한 이에야스에게 등을 돌리고 이시다 미스나리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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