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는데 자녀가 없다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정실 뿐 아니라 많은 후궁이 있었지만 나가하마 성주때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고 난 뒤에는 다른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589년 측실이었던 아사이 자차 사이에서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53세 였었는데 엄청나게 기뻐했으나 불행히도 3세때 사망하여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실의에 빠지게 되었는데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도요토미 히데스구에게 양도하고 관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다시 히데요시는 아이를 나았는데 이 아이에게 무조건 정권을 준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후계자 다툼에서 방해가 되는 도요토미 히데스구를 모반 혐의로 할복시키고 그의 자손들도 모두 몰살하였는데 자기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낳은 비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데스구 일족의 숙청으로 도요토미 일족을 스스로 잃어버린 결과로 도요토미 히데스구의 가신으로 있던 터줏대감 가신들도 여럿 할복하고 자신의 힘이 되는 무장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멸망의 원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또한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히데요시의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도 이미 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을 통일하고 난 후 도요토미는 중국 대륙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에 쳐들어 가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어 달라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협상을 요청하였지만 당연히 거절당하고 격노한 도요토미는 나고야에서 성을 축조하고 조선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령관으로한 15만명 이상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전국 시대를 거쳐온 도요토미 군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하면서 조선에 불만을 가진 자들의 협력도 받아 조선의 수도를 빠르게 함락시키고 명나라의 국경 근처까지 군대를 옮기게 되었는데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이 도착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바다를 지배하게 되면서 군량미의 공급이 어렵게 되었지만 오히려 조선내에 있는 군대보다 큐슈와 부산 해상 루트에 있는 도요토미 군이었다고 전해졌는데 점점 민중의 저항과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명나라의 원군에 패배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와 강화 교섭에 들어갔는데 도요토미는 설마 자신의 군대가 명나라에 패배하고 강화 협상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임명한다는 명나라의 요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의 요구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에 대해 분노하고 다시 14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한반도에 침략하였으나 한반도 남부에서 조선군이 격렬한 저항을 하고 히데요시가 1598년 9월에 사망하여 결국 조선에서 침략하게 되었는데 전란으로 인해 조선은 인구감소, 농경지 파괴 등과 명나라 원군 요청으로 인한 거액의 재정지출로 국가 멸망의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전쟁의 패배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도 흔들리기 시작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향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몰아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조선에서 도공 기술자를 일본에 데려와 일본 문화가 크게 발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일본은 한반도에서 문화와 기술을 가져오다가 도요토미 전국통일 이후 조선에서 기술자를 많이 데려와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히데요시의 정치 특징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정에 의한 절대적 권위를 이용해서 관백과 태정대신으로 정치를 실시하고 밝은 성격과는 다르게 정치 운영은 독재적으로 통치를 하였습니다.
1588년에는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이 사무라이가 되는 것 같은 일을 방지하고 봉기를 일으키기 어렵게 하였으며 농민은 어디까지나 농민 신분을 유지하게 하여 식량생산에 도움을 주었으며 무가의 하인이 서민이나 농민이 되는것을 금지하여 신분의 고정화를 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