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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통일

by 건강맨1213 2017.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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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시절은 이야기 등으로 각색된 부분이 많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고야시 나카무라 구에 있는 한 마을에서 평범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마을을 뛰쳐나와 스루가의 가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동료로부터 왕따를 당하는것을 보다 못한 마스시타가 히데요시를 자신의 원래 고향으로 보냈는데 이마저도 확실한 자료가 있지는 않습니다.

1554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관직에 오르는데 성공하여 그가 어떻게 인정을 받아 노부나가 옆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점점 출세하여 아사노의 양녀 네네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이례적인 연애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얼굴이 원숭이와 비슷하여 노부나가에게 원숭이라는 별명으로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동생과 다케나카 반, 하치 스카 등의 부하와 협력하여 계속 전공을 새워 교토의 통치를 담당하게 되었고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요새를 공격할때 아자이가 배신하여 노부나가를 덮치려 할때 후퇴하는 노부나가를 엄호하고 가장 위험한 마지막 꼬리 부분을 담당하여 노부나가가 퇴각할 동안의 시간을 벌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케치 마스히데의 협력으로 철수에 성공하여 문관으로서만의 재능이 있었다고 보여졌던 히데요시가 무장으로서도 매우 유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73년에는 아사이가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될때 도요토미는 북쪽을 맡고 나가하마의 성주가 되었으며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가스이에와 니와나가히데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와 히데요시라고 자칭하였는데 이로인해 키노시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습니다.


성주가 된 히데요시는 지역에서 유명한 가토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최고의 맹장으로 활약하는 유망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으며 히데요시 가신단을 충실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노부나가 군단 중앙군 총사령관으로 중앙지역을 지배하는 전국 다이묘와의 싸움을 시작하였는데 돗토리성을 차지하는 싸움에서 돗토리 주변 쌀을 전부 사재기하여 돗토리성으로의 군량을 반입할 수 없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군량미가 바닥난 돗토리성안에서는 3개월동안 지옥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가축은 물론 곤충과 인육까지 먹어 허기를 달랬다가 항복하고 요시카와성주는 할복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582년 히데요시는 히메지에서 출진한 모리가문의 시미즈 무네하루가 보호하는 오카야마성을 포위하고 고립시켜 돗토리성때와 마찬가지의 전략으로 대치하는 중에 혼 노지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마스히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히데요시의 귀에까지 들려오게 되었는데 

빠르게 교토로 회군하여 노부나가의 원수를 토벌하고 노부나가 사후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스히데를 토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새워 발언권을 확보한 후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자리에서 히데요시가 양육하고 있던 오다 히데노부여야 하며 영토의 재분배 등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시바타 가스이에는 노부나가의 여동생과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승가를 물리친 히데요시는 한해동안 과거 적대적인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성곽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교통편이 매우 좋고 서일본도 노려볼수 있으며 교토와 가까운 사카이와스 미요시 등의 상업도시 가까이에 있어 편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오사카성 및 오사카 역사의 시작이며 오사카의 지명은 현재 우에마치 다이치 부근을 발상으로 하는 지명으로 고대에는 난바 궁이 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까마귀로 표기되어 있는데 예전 지명은 3글자로 된 것이 많고 중국의 영향으로 나중에 지명을 2자로 변경하였습니다.

이것에 따라 까마귀는 코사카라고 쓰여졌는데 이시야마 혼간지가 세력을 넓여 무로마치 시대가 되었을때는 오사카라고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 중앙지역에서 싸운 모리데루모토는 히데요시를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할수 있다고 확신하였는데 히데요시가 중앙지역을 한꺼번에 손에 넣고 천하를 호령하는 다이묘로 더욱 두각을 나타내자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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