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지의 다이묘가 다투는 가운데 천하 통일을 목표로 싸운이가 오다 노부나가 입니다.
어렸을때 집안에서 바보취급을 당하였지만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때부터 싸우고 있던 이마가와 일족과도 경쟁을 벌일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 침공을 하였는데 이마가와 군의 병력이 2.4만에서 3.2만정도 였는데 오다군은 5~6천 정도의 병력이라 숫적열세에 굴하지않고 멋진 승리를 따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불리는데 전국 통일의 목표를 다지기 위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전사 시킨것을 보아 노부나가의 용맹함을 알수 있는 사건이 었습니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유명한 전투였는데 그 실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전투가 행해진 장소조차 현재의 나고야시 미도리구와 도요 아케시 2개의 장소가 전투지로 꼽히고 있어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일가에서 독립한 소꿉친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북과 서로 세력 확장을 노렸으며 1567년에는 미노 지방의 사이토 다스오키를 격파하고 고대 중국의 주나라 문왕이 기산에서 금 왕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것과 공자의 탄생지인 곡부 등의 영향을 받아 이나바 산성을 기후 성으로 개명하였습니다.
단번에 세력을 확대한 노부나가는 쇼군 취임을 목표로 하는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미 노부나가는 전국 다이묘들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에 취임시켰습니다.
자신을 쇼군에 취임시켜주어 감격한 요시아키 였지만 쇼군의 권력 확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에게 쇼군은 명예직이라 생각하는 노부나가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각지에 서신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노부나가는 이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이길수 있도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출전하였는데 아사쿠라 일족과 관계가 깊었던 아자이 나가마사가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는 바람에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덕분에 겨우 탈출 하여 교토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이 노부나가가 가장 힘든 시점이었는데 이치젠의 삼인방과 오사카 등지에서 봉기가 일어나는등 주위는 온통 적 투성이 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소꿉친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아자이 나가마사를 신뢰하였지만 배신당해 분노하였는데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쿠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3년후 양 일족을 멸망시켰습니다.
노부나가에게 반항한 히에이 엔라쿠지를 방화하고 1573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내 노부나가는 조정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었으며 이세 나가시마 이듬해 이치젠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치젠 평정과 마찬가지로 1575년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함께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뒤를 이어 다케다 가스요리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케다 가문의 세력을 크게 감소하였으며 이시야마 혼간지를 항복시키고 나가시노의 패배에서 회복할 수 없었던 다케다가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중부 지방 거의 모든 지역을 손에 넣어 전국 제일 세력을 만든 노부나가는 호쿠리쿠와, 중부지방, 관동지방 등의 침공도 계획하는등 전역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지만 모리 공략을 위해 출진하였는데 중신인 아케치 미스히데의 기습공격을 당하여 죽어버렸습니다.
노부나가의 적남이었던 오다 노부타다는 노부나가의 급슥 소식을 듣고 출진하였지만 군대가 많지 않아 아케치 군대와 전투에서 힘이 다해 죽어버렸습니다.
노부나가의 성격을 정리하자면 냉혹하고 잔인한 성질인데 2만명을 즉각 참수하고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일족 520여명을 4채의 집에 가두어 타죽이는 등의 잔인함과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원래 승가는 노부나가가 집안을 상속받을때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노부카츠를 지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에 항복한 후 충실한 신하가 되다가 최강의 맹장으로 활악하였는데 능력이 출중하고 충성심이 높아 노부나가도 불만이 없었으며 항상 최고의 무장으로 대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