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1467년에 발생한 것이 오닌의 난인데 일본이 전국 시대에 돌입해 나가는 시기였습니다.
그 전초전으로 큰 전쟁이 났는데 막부와 다이묘 사이의 권력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아시카 막부는 빨리 은퇴를 하고 싶었던 8대 쇼군이 아내 히노도미코에 대해 나와 너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하여 스님이된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를 다음 쇼군으로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요시마사의 아들이 태어나고 히노도미코는 다음 쇼군은 우리 아들이 될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지만 아시카가 요시미도 언제든지 쇼군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여 서로 경계를 하였는데 아시카가 요시히 측은 야마나 소젠을 중심으로 뭉친 그룹이 요시미의 호소카와 가스모토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지원했는데 호소카와 가스모토의 아내는 야마나 소젠의 딸이라 원래 둘은 사이가 좋았지만 어느 쪽이 막부의 주도권을 쥐게 되느냐로 인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타케야마가, 시바 일족 등이 다툼이 생겼는데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내편이 되어달라 하고 원군을 요청해 교토에 군대를 집결하여 커진 것이 오닌의 난입니다.
초기 대립구도를 보자면 호소카와 가쓰모토 연합(동군)과 야마나 소젠 연합(서군)으로 나뉘어 호소카와 가스모토는 본진을 교토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저택에 두고 야마나 소젠의 꽃의 저택이라 불리는 곳보다 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을 본진으로 하여 그 위치 관계 때문에 동군과 서군이라고 나뉘게 되었습니다.
1467년 5월 첫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첫번째에서는 동군이 승리를 거두어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맞이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두번째에서는 동군이 서군에게 선제 공격을 하였지만 같은해 8월에 서군에 스오, 나가토 등 힘센 다이묘인 오우치 마사히로가 이끄는 대군이 원군으로 등장해 10월 전투에서 서군이 동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그리고 교토에서 전쟁이 벌어져 곳곳이 잿더미가 된 후 당분간은 정전 상태가 되었는데 나는 언제 쇼군이 될까불안해 하는 아시카가 요시미를 서군이 먼저 집으로 초대하여 권유에 성공하고 아시카가 요시히사와의 친분이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교토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고향을 신경쓰지 못하여 자신의 고향에서 봉기가 발생하여 다시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도 다수 생겼는데 특히 서군에 이탈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호소카와 가스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잇따라 사망하여 오닌의 난은 종결하였는데 작은 싸움이 1477년까지 계속 되어 오닌 문명의 난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시카가 막부의 경우엔 결국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제 9대 쇼군이 되었지만 쇼군이 힘이 없고 쇼군을 지키는 하타케 야마와 시바 일족등이 몰락하여 결국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는 다이묘의 가신인 수호대와 현지 외국인들이 힘을 길러 다이묘를 쫒아낸 일이 생기는데 그리하여 전국시대로 돌입합니다.
오닌의 난동안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정원만들기와 단가에 열중하는 등 현실을 도피하는데 그 집대성이 교토 금각사 입니다.
아내인 히노도미코는 어수선한 남편을 대신해 세금을 부지런히 편취하여 지금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오닌의 난을 틈타 지역 무사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위해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무려 8년동안 계속되어 보기 드문것이 되었고 결국엔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원래 자리에 있던 다이묘가 쫒겨나 부하가 정권을 탈취한 하극상이 종종 발생하엿는데 미노의 다이묘인 토키가 축출되고 사이토 도산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쫒아낸 것이 대표적 예인데 훗날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를 지원하였지만 자신의 아들인 사이토가 모반을 일으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다와라 호조 일족의 시초로 이름을 날렸던 이세는 모라마치 막부의 가신인 이세 일족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여동생이 쓰루의 다이묘, 이마의 아내가 되어 인연으로 이마가와 가문의 신세를 지고 이마가 죽은후 상속 분쟁에 개입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 공적으로 이세 성을 얻는데 성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