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를 계승한 것은 그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미치인데 아시카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9살 때 장군이 되고 실권은 요시미츠가 잡겠다는 구도였습니다.
그런데 1416년 발생한 우에스기의 난을 평정하고 관동 관령인 우에스기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와 대립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황궁을 급습하여 시작한 것으로 원래 두사람은 사이가 매우 나쁜데 영지를 우에스기 본가의 영지를 아시카가 몰수한 것부터 불화가 표면적으로 구체화 되었는데 우에스기는 야마우치와 타쿠마 등 4개의 가문이 현재 관동 관령인 야마우치 우에스기의 우에스기 노리기와도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런데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을때 아들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쇼군 자리를 양보하였는데 정치의 실권은 아버지와 유력 다이묘 들이 쥐고 있어서 요시미츠는 젊은 나이에 실각하여 없어져버렸습니다.
그 밖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쇼군의 부재 그대로 정치를 대행하고 있었는데 1428년 사망 직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중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쇼군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하여 중신들끼리의 추첨으로 쇼군을 선택하게 되고 그결과 쇼군으로 취임한 것이 아시카가 요시노리였습니다.
그는 취임후 제비 뽑기 쇼군이라고 바보취급 당할 수 없다 생각하여 쇼군의 권력을 높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대립한 것이 가마쿠라 쿠보 아시카 였습니다.
관동 관령의 우에스기는 막부와 가마쿠라 막부의 사이를 이간질 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관동 관령을 사임하였습니다.
이 것을 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에이코10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난을 일으킨것이 에이코의 난입니다.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에는 장원의 힘이 약해진 것도 있고 킨기 지방과 그 주변 마을이 점차 독립적인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는데 농민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도록 새로운 마을을 소유하고 그에 응하는 것으로 소우라는 힘 있는 농민을 군주로 만들어 중심으로 결집하였지만 점차 일반 농민이 장원의 테두리를 넘어 지역 단위로 결합하여 합의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운영 선출자들을 뽑고 경찰과 사법 행위도 하였습니다.
농사에 중요한 산과 들판은 공통소유로 하고 확보와 보수, 관리를 하였으며 영주에게 바치는 연공을 일괄적으로 납부하였는데 이것이 개인으로 납부하는것보다 마을로 하는것이 더 저렴하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때는 모두 모여 기도를 하고 장원을 다스리는 대관과 영주가 마음에 안들때는 전원이 경작을 하지 않고 산과 바다로 도망치는 파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봉기가 발생하였는데 아시카가 요시 모치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운송업체들이 빚을 탕감할 것을 막부에 요청하는것을 포기하고 교토 주변 상인들과 술집이나 관공서를 습격해 빚을 차용증서로 빼았었습니다.
에이코의 난과 유키 전투에서 볼수 있듯이 점점 마을을 통제해 나갔는데 힘있는 다이묘를 처형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었는데 오히려 다음은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요시노리를 집에 초대하여 살해하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