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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의 절정

by 건강맨1213 2017.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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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요리유키 실각 전년인 1378년 아시카는 교토의 무로마치에 만든 화려한 궁에 이사하였는데 여기서 무로마치 막부라는 이름이 훗날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는 강력한 쇼군을 목표로 자신의 목표에 방해가 될만한 유력 다이묘의 세력들을 감소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세미노 오와리가 3국을 지배하는 토키 일족의 세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이름만 등장한 토키가 죽은뒤 그의 아들은 미노 오와리의 다이묘 직을 동생인 토키에 이세의 다이묘 직을 주고 난을 일으키는 요시미츠는 막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하여 로서이를 토벌하였는데 토키가 항복하면서 이세의 다이묘 직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키는 이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유력한 다이묘들의 세력을 삭감하는 것만으로는 단순히 무로마치 막부의 세력만 감소할 뿐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힘을 전에 아시카는 남북조로 나눠진 조정을 하나로 하려 하였습니다.

다양하게 협상이 계속된 후 1392년 남조의 가메야마 천황이 다시 교토에 북조의 코마츠 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결국 남북조의 합의를 이루어 냈는데 본래 조정의 본거지인 교토의 시정권 등을 조정에서 막부에 옮겼습니다.

아시카는 자신이 천황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는데 1406년 아시카가 아내인 히노 야스코를 무가 뿐 아니라 문신의 세계에서 요시미츠의 큰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 침공해온 몽고는 쿠빌라이 사망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원장이 이끄는 부족이 중국을 통일하게 되고 주원장은 명나라라는 국가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중국을 적통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회복을 위하여 여러 국가에 수교를 요구하게 되고 국가의 국왕이 명나라의 황제에게 공물을 가지고 오게하여 우리는 황제에 종속된다 선언하는 대신 명나라는 다른 국가에 큰 내정간섭을 하지않고 답례로 다양한 물품을 주고 명과의 무역등을 허용하는 등 여러가지 혜택을 주었습니다.

명나라는 일본에게도 수교하자 제안하였는데 이 무렵에 규슈와 그 부근의 섬들을 근거로 중국해안과 조선을 마구 털던 왜구라는 해적집단의 단속을 요구하였습니다.

아시카가 1401년 트르라는 스님을 정사에 후쿠오카 상인을 부사로 하는 사신단을 명나라에 파견하고 국교를 수립하였는데 이때 요시미츠를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이라하고 명나라의 황제에게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어버렸는데 천황 취임하기전 아시카가 사망하여 버렸습니다.

이렇게 일본과 명나라사이에 무역이 시작되었는데 명나라에 무역선을 파견할때 입국관리소로 사전에 명나라에 감합이라는 여권을 보여줘야 된다는 사실이었는데 무역선은 중국 닌보 항구에서 중국측 소유의 것과 일본측 것이 같은 것인지 확인 후 정식 무역선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이런 무역을 감합 무역이라 하였으며 일본의 수출품으로는 황, 구리등의 광물, 도검, 부채, 나전칠기, 병풍 등이었고 수입품으로는 영락(영락제때의 화폐), 작물, 책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락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때 발행된 화폐인데 중요한 물품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율령체제의 붕괴와 함께 화폐를 발행하는 공공기관과 기술이 없어진 일본에서는 질 좋으면서 대량으로 수입 가능한 영락이라는 화폐가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 영락은 중국에서 주조된 화폐로 대량으로 일본 경제에 침투하여 화폐를 사용한 거래가 급속히 일반화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 모치는 형식적으로는 복종한다 해도 명나라 황제에게 종속되는것은 안된다고 하고 명일 무역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이 무역은 명나라의 자존심을 충족시켜주는 대신 무역 종사자에게 운반비 등 각종 비용을 명나라가 모두 부담해주는 매력적인 무역이었는데 이것을 중단시켜버려 상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들었으며 막부의 수입원도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6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때 다시 재개되었는데 막부의 권력이 크게 약해진때 호소카와 일족도 점차 세력을 잃고 오우치 일족의 독점이 계속되어 갔는데 오이치는 모리모토나리에 의해 멸망되어 명일무역은 종료되게 되었습니다.


대신 조선과의 한일 무역도 성행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지금까지 고려를 대신하여 1392년에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통교 무역 무역을 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아시카가 대등한 관계에서 막부의 독점이 아니라 다이묘와 호족까지 자유롭게 참여시켜 무역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조선에서 오히려 곤란하게 생각하였는데 왜구가 난리를쳐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쳤지만 조선 군대가 패배하여 일시 중단 되었는데 주로 무명을 많이 수입하여 사람들의 복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구리와 유황, 향나무 등을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3포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측의 사절을 접대하는 왜관을 설치하여 다양한 특권을 주었으나 영조7년 왜관의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삼포 왜란이 발생하며 그 이후 북일 무역은 매우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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