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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우지 정권의 성립

by 건강맨1213 2017.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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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우지는 1336년 겐무를 겸임하고 실질적으로 막부를 여는데 겐무는 타카우지의 자문에 대해 천태종 스님 등의 저명한 법률가들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막부의 위치는 교토로 하며 원래는 가마쿠라에 막부를 해야되지만 호조 일족이 멸망한 불길한 장소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며 절약과 역임과 유흥을 하지 않는다.

서민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하지 않는다.

문신과 여성, 승려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였고 뇌물 수수 금지로 깨끗한 인물들만 임명하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교토에 열린 다카우지 막부는 나중에 교토에서 자신들을 무로마치 막부라고 하였지만 다카우지 시대에는 다른 위치에 있었으므로 헷갈리지 않도록합니다.

새로운 막부의 조직은 가마쿠라 막부의 구조를 기본으로 계승하지만 집권대신을 두어 자신의 영지에 뿌리를 내립니다.

다카우지 막부 성립 초기에 통치 계통을 보면 형은 전국적으로 관리하고 동생은 지역적인 문제를 담당하였는데 둘이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막부가 열리고 난 때부터는 점점 정치에 참견하지 않게 되어 고다이고 천황을 내쫒은것에 대한 미안한 생각에 우울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고다이고 천황을 유배보내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요시노에 있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한동안 점차 다카우지가 가지고 있던 권한은 집사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점차 아시카가 타다요시 진영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와는 다르게 일족들이 서로 결속하지는 않게 되었으며 각각 자신의 영지를 확대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338년 시즈의 싸움에서 젊은 군주인 기타바 타케아키이에가 고노모로나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는데 당시 21살이었습니다.


또한 후쿠이현의 후지시마 싸움에서 니타요시가 시바와 호조카와의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함에 따라 남조의 핵심이 되었던 무장들이 모두 전사하여 고다이고 천황은 상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위해 교토에 사원을 건설하고 고다이고천황과 사이가 좋았던 선종의 스님인 무소 소세키의 도움으로 사원을 건립하고 막부의 선전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집권자였떤 호조는 전사자를 애도하여 전국에 사원과 탑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안코쿠사와 류우탑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입니다.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이었던 타케지카후사는 히타치국의 오다성에 들어가 신황정통기를 집필하였는데 각지에서 싸우면서도 집필 작업을 하였고 신화시대부터 고다이고 천황, 그 뒤를 이은 무라카미 천황까지 역대 천황에 대한 내용을 저술하며 무라카미 천황에 대한 교육과 남조의 정당성을 북조의 무사들에게 호소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큐슈에서는 남조세력이 확대되고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에서 카넬라친황은 가고시마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구마모토 현에 진출하는데 다카우지 사후 1359년 치쿠고강에서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세력을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고노모로나오와 타다요시가 대립을 시작하게 되면서 먼저 선수를 친것이 타다요시인데 고노모로나오를 집사직에서 해고시키며 쿠테다를 실행하고 막부 주요 부를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수 없었기에 교토를 탈출하면서 적이어야할 남조와 강화하여 아군을 끌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다카우지는 도카이도 가마쿠라에서 싸움에 승리하고 종결되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항복시킨 남조였지만 조급함이 들어 마상키의 동생이 교토에 쳐들어가 성을 지키던 요시아키라를 쫒아버렸는데 이것은 남조와의 약속을 위반한 사항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에스기가 관동관령으로 복귀하고 가마쿠라 막부를 지탱하는 중요한 집안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1358년 다카우지는 55세에 사망하게 되었는데 악성 종기로 인한 사망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다카우지 초상화로 널리알려진 갑옷입은 모습은 사실 입고있는 장식품 등에서 볼때 고노모로 나오가 모델이 아닌가 라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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