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막부의 조직만들기는 무사에 한한 기본적인 법률이라는 것이 원칙인데 커진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 지금까지 관례상 분쟁 해결등으로 역부족이었는데 그렇다고 조정의 율령을 귀족사회의 법률이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법을 제정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3대 쇼군에 취임한 호조 야스토키는 우선 호죠가문이나 유력 인사들에 의한 합의 조직 효 조슈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내각같은 것으로 막부의 정치 재판의 최고 평의회 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효조슈의 멤버인 오타들에게 명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1323년에 51개조로 구성하였으며 수호에 관한일 영지를 둘러싸고 재판에서 싸운일 등 영지의 상속에 대한 결정에 대해 범죄와 형벌 등에 관한 법률이었습니다.
이에따라 법률면에서도 무가사회는 독자적인 노선을 가지자고 선언한 것과 같은것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후 무가사회의 법으로서 존중되는 것이 많고 훗날에도 막부에서 기본법으로 무가 제법도를 기반으로 하는등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나모토요리에 시절 쇼군은 있었지만 미나모토사네토모가 살해되자 드디어 상징적인 인물이 나타나는데 가로쿠2년 호조 요시토키는 교토에서 후지와라를 제 4대 쇼군으로 맞이하였는데 그는 요리모토 조카의 딸이 낳은 자식으로 요리토모일족의 피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징적 인물로는 최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호조일족에게 조종되는것이 불만이었던 어가인은 안에서도 호조일족에 대한 불만이 높았는데 19세의 젊은 나이로 제4대 쇼군으로 집권하였다가 호조 키타는 압력으로 쇼군의 자리에서 쫒아내고 그의 자식을 5대 쇼군으로 하였는데 전 쇼군이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가마쿠라에 버티고 남아 반 호조일족은 군란하게 되어 버렸는데 집권에 취임한지 고작 4년만에 동생인 호조 토키요리에 직권직을 물려주고 사망하였는데 사망당시 23세의 나이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일족은 점차 본가 중심으로 되어갔지만 호조일족도 예외는 아니라 본가의 힘이 강해져 일족 들끼리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1246년 나고들이 쿠조를 우방으로 집권직을 빼앗으려 모반을 꾀하고 이에 대해 토키요리는 수긍하고 이 운동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나고를 유배보내고 죠역시 가마쿠라에서 쫒아 보내버렸습니다.
이에 호조토키요리는 최대 유력 인사인 미우라 일족을 겨냥했는데 도발을 하지만 좀처럼 응하지 않았지만 토키요리의 외할아버지가 미우라일족에게 기습공격하여 미우라도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큐의 난이라는 전투가 진행되지만 미우라 일족의 패배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묘가 있는 법화당 옆에서 자결하여 치바일족도 멸망하였습니다.
모리는 불쌍하게도 그의 아내가 미우라의 여동생으로 딸이 호조토키요리에 아내가 되어 있다는 상황에 붙잡혀 결국 며느리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아들 3명과 자살하였습니다.
이때 넸째 모리일족만 영지가 있어서 나가타현에 있던 모리는 살아 차남 모리가 아키타 카타시 요시다쵸를 본거지로 하여 전국시대부터 에도막부 말기까지 명성을 떨친 모리 가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죠도 성인이 되면 아버지처럼 호조를 반대하는 정책으로 나갔다가 호조토키요리의 눈밖에 나 그를 추방하고 천황가에서 무네타카천황을 영입하게 되어 이것을 이후 궁쇼군이라고 총칭되도록 황족이 쇼군이 되어 갔으며 이것은 완전한 보여주기식 인물로 20년까지 이어진 쇼군직을 사임하게되고 교토에 돌아오게 되는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독재 정책을 강화하는 호죠에 대한 비판을 줄이려 1249년 사로무사를 설치하고 호조슈아래 둔것이 소송 전문 기관으로 운영되었는데 이것은 전문 소송을 취급하기 때문에 재판이 빨라졌고 공평성이 유지되었습니다.
토키요리는 이외에도 민중을 보호하는 정책을 내세워 후세까지 명군으로 칭송받고 집권하게 되었는데 1251년 병에 걸려 직권직을 사임하고 호조 기리시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는데 실질적으로는 토키요리가 죽을때까지 실권을 잡고있는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쇼군지위도 장식에 가가워 졌으며 본가의 실권을 잡는것이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덧붙이자면 토키요리는 겐조5년 가마쿠라에 미치타카라는 중국의 위대한 스님을 불러 임계종의 절을 건립하였는데 건물 자체는 에도시대에 만들어 진것으로 가마쿠라에서도 특히 유명한 사원으로 존속되고 있으며 많은 참배객과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