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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일족의 전성기

by 건강맨1213 2017.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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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일족의 전성기는 946년 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하고 21살에 즉위한 이 천황이 거듭되는 사회의 혼란에 직면하여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고 분투하고 있는 도중 그의 파트너가 된 것이 우대신인 후지와라대신 이며 후지와라 다다히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천황은 종래와 같이 관백을 두지 않고 스스로 정치운영에 나서고 있었는데 즉위 2년까지는 관백이 역임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스스로 정치운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전쟁을 제외한 평시상황에서 귀족들의 무장은 허락되지 않고 비무장에서는 싸울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는데 평소에도 무장시 싸움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박에 조정에 의한 마지막 화가였던 간원다이호 발행과 단가의 집은 고센카슈의 편찬 등 문학의 진흥이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댄 무라카미 천황의 정치는 천력의 부흥이라 하였지만 세상의 혼란과 황폐함, 전염병의 유행은 막을 수 없었고 967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던 승려는 귀족부터 민중까지 폭 넓은 인기를 모으고 이후 불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무라카미 천황이 죽자 그의 아들인 레제이 천황이 즉위하엿는데 여기서 다시 후지와라 일족의 전성기로 다른 일족의 배척이 생겼는데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겼으며 우대신인 후지와라가 관백, 태정대신을 하라고 통보하고 조사를 하였던 결과 죄를 자백하고 이 계획에 후지와라 치하루와 황태자 왕비의 아버지인 좌대신 근원 고명도 관련되었다고 결과에 알렷는데 토사후지와라 치하루는 이러한 일에 휩쓸려 좌천되었고 레제이 천황은 동생인 평 황태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동생이 엔유 천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새로운 천황이 즉위할때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누가 섭정과 관백이 될것인가 하는 문제가 잇었는데 기본적으로 후지와라 일족의 전성기에서는 후지와라 일족이라면 누구나 섭정이나 관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후지와라다다히라의 직계 자손이 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로 인해 형제, 삼촌, 조카 등 친족간의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출세 경쟁은 레제이 천황이 되어서 동생쪽이 한발 앞섰는데 다시 엔유 천황 시대가 오자 맏형으로 섭정과 태정대신 자리에 있떤 후지와라의 형이 질병이 생겨 사퇴함으로서 형제의 후계자 다툼이 본격화 되었는데 미리 선수친것이 무라카미 천황의 황후였던 야스코가 유언으로 쓰고 있었던 편지에서 관백은 형제의 순서에 따라 하라 하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엔유 천황에게 보여주고 어머니의 유언이 틀림이 없다면서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형이 먼저 관백이 되어 출세경쟁에서 승리하여 후지와라 일족의 전성기 기쁨을 맛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좋은 날은 얼마 가지 못하고 관백 취임 5년 후에 그가 갑자기 병으로 중태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음 가잔 천황때 후지와라가네에 이어 자신의 딸인 후지와라가 엔유 천황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즉위 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도중 가잔천황이 좋아하는 왕녀가 사망하는데 슬픔에 잠겨 출가하고 속세를 벗어나고 싶다하여  가잔천황은 출가를 하게 되고 후지와라미치타카가 관백을 총 5년 역임하고 99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동안 그는 이치조천황과 자신의 딸인 후지와라데시를 시집보내 천황의 왕비로 최상위인 중궁에 앉히는데 성공하였으며 후지와라 데시에 유명한 일기문학인 쿠라 노소시를 집필한 것이 세이쇼나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잔 천황이 출가한 2년뒤인 988년 후지와라천명이 수령으로서 부적합하다며 파직하라는 호소문이 빗발치고 있었는데 원인을 보니 오와리의 군지에서 농민까지 많은 사람들이 9천자가 넘는 문장으로 보냈는데 내용을 보니 법률에서 정한 정도 이상의 쌀의 양을 농민들에게 강제로 대출해주고 불법 이자를 징수하였습니다.

관개 시설수리비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전년도 예산 잔액을 마음대로 횡령하여 자신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신궁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의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임에도 농민을 사사로이 징발하였습니다.

군지와 농민의 재물을 사사로이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9천자에 걸쳐 적혀있었던 것을 보고 조정도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이듬해 후지와라를 관백직에서 파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나쁜 짓은 이외에도 수많은 것 들이 있었던것 같고 사사로이 기름지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임기동안 얻은 수익의 일부를 진상함으로써 환심을 사 다음 관백자리나 벼슬을 얻고자 함에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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