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동아시아와 일본의 정세에서 잠깐 동아시아의 상황을 보자면 스가와라 미치가 실각한 후 6년 후인 907년 그가 예상했던대로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당나라라는 국가가 875년 황둥지의 난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주전충이라는 인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량이라는 국가를 건국하는데 당나라처럼 막강한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후당, 후진, 후한, 후저우와 같이 차례로 국가 정권이 교체되어 지방에서는 10여개의 소국이 분립하고 이를 오대 십국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당나라라는 거대 국가가 동아시아 각 국가에 조공을 하며 형식으로 각 국가를 지배하는 한편 당나라의 위험 보호를 해주는 관계가 붕괴하였는데 그 영향도 있지만 전후 형태로 한반도는 일본과도 관계가 깊었떤 신라가 약화되었습니다.
900년 도읍을 전주에 정한 후백제가 901년에 도읍을 개성에서 태봉이 독립적이고 격동하는 동아시아와 일본 다시 한반도는 삼국 쟁탈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을 후삼국 시대의 개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는데 918년 후고구려의 국왕 궁예가 신뢰를 잃고 추방된 것에 따라 재상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이 고려가 신라와 태봉을 복속시키고 936년 한반도를 통일시켰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막강한 후백제에 고생한 결과 고려에 굴복하는 방책을 채택하여 고려에서 환대 해 달라고 하는데 성공하였는데 후백제의 왕인 견훤은 아들들이 전쟁을 시작하여 고려로 망명하였는데에 따른 특별한 한반도 통일시나리오 였습니다.
또한, 926년 발해가 멸망하였는데 발해는 격동하는 동아시아와 일본 중국 동북부에서 조선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것으로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목민들과 말갈족에 의해 건국된 것이었는데 일본과 신라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고 활발한 교류와 무역을 727년 이후 무려 34번이나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하며 발해는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920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상호 교류는 없었다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발해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시작하였고 916년에 요의 태조가 거란을 모아 요라는 국가를 만들었는데 요나라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시대의 일본의 대외관계는 당나라와의 관계만 주목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신라와 발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라와는 라이벌 관계였는데 753년 견당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대신이 당나라에 올라온 각 국가의 조공자리에 좌석의 위치를 신라보다 상위에 위치하도록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고천황과 후지와라의 분투에 스가와라 미치가 조정에서는 다이고천황과 후지와라의 콤비로 정치가 진행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지금까지의 율령 체제에 의한 정치가 붕괴되고 있었으며 일부 귀족과 사찰 지방의 유력자들이 장원이라는 사적인 토지를 많이 확보하였는데 지방의 호족과 농민들이 조정에서의 과세를 피해 유력자들에게 자신들의 토지를 기부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902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헌터는 실행되지 않았을 것 같고 한편 같은 해 법을 위반한 장원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태정관 부호에 황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는데 그래서 지방분권을 추진하여 일정한 세금을 의무화하는 한편 국내 지방정치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방 행정은 조정에서 파견되어온 자가 담당하고 조세의 징수 및 문서 작성은 군지가 하고 있었지만 중앙부처에서 파견되어온 가나가와 현 지사 카마쿠라 시장과 후지사와 시장을 대신하여 직접 지방 자치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법체계를 더욱 정비하여 907년 연희가 완성 되었는데 여러번 등장하고 있었지만 율령의 수정, 추가 법령이 발행되면서 총 12권에 정리되었는데 격이라고 하면 연희는 분이 완성이 늦어 후지와라가 죽은 후 927년에 완성되어 시행된 것을 40년 뒤입니다.
다이고 천황과 후지와라는 스가와라 미치를 쫒아낸것으로 대단히 악평 받았지만 정치면에서는 의욕적으로 국가 재건을 위한 개혁에 임하엿는데 정책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찌만 그가 30년동안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한 경험에서 정치의견 12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과세 대상자가 지방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어 이것은 국가 재정의 위기상태다 라고 하였습니다.
대학이나 신분이 낮은 관료의 대우를 시정하고 사치를 응징하며 당시 사회의 실상을 알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