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천황의 뒤를 이은 것이 헤이제이천황인데 공무원 감축과 행정 개혁등의 추진으로 세출 삭감을 목표로 하였는데 몸이 좋지 않아 격무에 견딜수 없다고 판단하여 동생에게 천황을 빨리 양보하였습니다.
이렇게 즉위한 인물이 사가 천황인데 사가 천황도 인력과 조직의 재검토로 조정의 세출 삭감에 대한 노력과 국가 기밀 사항을 다루는 쿠란을 설치하였는데 헤이안 신궁의 경찰기구의 충신을 노리고 게비이시를 설치하였는데 사가천황과 사이초 이러한 지금까지 영향에 정해져 있지 않은 새로운 직책을 료부신캔이라고 합니다.
점점 복잡해지는 실무를 간편화하기 위해 율령의 개정을 하고 손님을 실제로 시행하기 위한 규칙을 정하여 식을 분류하고 홍인 격식을 정비하고 법을 어덯게 해석하는지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법대전이 편찬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가천황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떤 헤이제이천황은 헤이조교에서 요양하는동안 몸이 회복되었는데 몸이 회복되어 다시 천황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감지하고 권력의 중추에 복귀를 꾀했던 것이 측근인 후지와라 남매였습니다.
그들은 가무 천황의 측근에 암살된 후지와라의 아들이었는데 아직 간무 천황의 재위시절 후궁에서 추방된 적도 있었는데 사가천황과 사이초 장교들에게도 동요가 확산되어 어디까지 기밀이 누설되었는지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치한 곳이 기밀을 취급하는 쿠란이었는데 천황이 신뢰하는 사람들만을 모아 그 상위인 쿠란의 우두머리를 앉혔는데 거기에 후지와라가 출신이 임명되었습니다.
세자는 810년 도시를 헤이안신궁으로 옮기는 것을 취소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사가 일족이 곧바로 반격을 시작하였지만 우연히 헤이안신궁에 있던 후지와라를 체포하여 참수함으로서 사카노 우에노 다무라 마로가 이끄는 군대를 헤이안신궁을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또한 기타 거점으로도 바로 조정군대를 파견하여 평성을 포위하였는데 일단 헤이조교를 탈출한 헤이였찌만 도망을 포기하고 불과 몇일만에 쿠테타는 종료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을 구스코의 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서기, 속 일본 서기에 이어 조정이 편찬한 일본사에 쓰여져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후지와라가 재개편에 참여하여 후지와라도 나쁘지 않게 쓴것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현실은 어떨지 알수 없었습니다.
일본 불교계에 2대스타가 탄생하였는데 최칭과 공해라는 인물인데 최칭은 시가현 출신으로 도다이지에서 수련을 한 후 헤에이에서 수행생활을 들어갔는데 그 속에서도 불교중에서도 천태 교학이 매력적이다 라고 생각하여 804년 7월에 견당사 선에 탑승하여 당나라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천태교회의 진언 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천태종을 열고 나라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떤 법무 장관 종교등 남도 육종으로 총칭되는 기존의 불교세력으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불교세상을 만들었는데 활동거점이 히에이 엔라쿠지입니다.
한편 공해는 카가와 현 출신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동안 사가천황과 사이초 야마토에서 대 일본 경제를 보고나서 밀교를 배우고 싶다 라고 생각하였는데 최칭과 같은 시기에 당나라에 유학을 하였는데 밀교 사회에서 굉장히 훌륭한 스님으로 너는 매우 우수한 인물이어 모든 것을 하사하노라 하여 밀교에서 그에게 많은 경전이나 만다라등을 부여하여 다양한 중국 문화도 흡수하고 2년만에 귀국하여 진언종을 열고 교토의 가오슝 산사에서 활동을 시장하게 되었습니다.
최칭은 자신도 밀교를 배운적 있어 공해와 친하게 지냇는데 812년 공해에게 감정을 수여받고 머리에 물을 붇고 비법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두사람 사이가 견고해 보였는데 4년후 교리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엇는데 최칭의 애제자가 공해에게로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절교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최칭은 법상종의 학승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하고 후쿠오카현과 관동지방을 정략적으로 활동하여 불법에 의해 국가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천태종의 지위를 올리고 자하였는데 82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이시대에는 후지와라일족과 타치바나 일족 등 유력한 일족이 자신의 일족을 위한 대학별 카오란을 건설하고 국가 공인 교육기관으로 운영하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관료 양성 기관이었던 것인데 후지와라 일족이 13세기 까지 존속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헤이안 말기에 쇠퇴하였는데 다양한 도서의 소장과 숙박 시설을 갖춘 것이었고 유지비가 만만치 않아 헤이안 말기에 쇠퇴하였지만 후지와라 일족의 번영에 따라 다른 가문이 몰락한 것을 마지막으로 귀족 자체가 몰락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불교가 점차 본격적으로 서민들 사이에 침투하고 있었고 일본 고유의 신들과 결합되어 신불습합과 좋은 신사에 사원이 생기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으며 천태종과 진언종은 산중에서의 엄격한 수행을 메인으로하여 일본 고대의 산악 숭배와 결부 수도자로 대표되는 수험도의 근원이 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