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by 건강맨1213 2017. 8. 13.
반응형

지금까지의 황족은 모노노베 일족과 소가 일족 등 수많은 세력의 싸움으로 때로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정치가 운영되고 있었다고 했지만 나라 시대부터는 후지와라 일족이 정권 기반을 반석위에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올려놓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쇼무천황의 아들인 후지와라 노후이토는 황실과 깊은 연결을 가지는 것으로 정권기반을 강화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자신의 딸인 후지와라미야코를 문무천황에게 시집가게 하였는데 훗날의 쇼무천황인 목황태자에 시집을 보냈습니다.


후지와라 노후이토는 이미 목황자를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세력도 많고 715년 겐메이천황이 건강이 나빠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고 밝혔는데 이미 15세때 목황태자에게 황위가 돌아오지 않고 문무천황의 동생이 즉위하였습니다.


결국 비율 등은 목황태자가 즉위하는 모습을 보지않고 사망하였는데 724년이 되어 목황태자가 즉위하고 다음 쇼무가 되었는데 이 쇼무천황을 지지한 것이 텐무천황의 손자이고 타케치황자의 아들이 나가야왕과 후지와라노후이토의 4명의 아들이었으며 후손들이 격렬하게 출세경쟁을 하기 위해 후지와라를 구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가야 왕은 구사카베황자와 겐메이천황이 부모인 키비 내 친황과 결혼이 유력한 황위 계승자 중 한명으로 주목받고 있었는데 후지와라 4형제에게는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으며 게다가 쇼무천황의 자식을 낳고 후지와라 4형제는 곧바로 이를 황태자에 세우는데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곧바로 죽어버렸는데 쇼무덴노의 다른 왕비도 아들을 낳고 말았는데 이 아이가 장차 황제가 되어 버리면서 후지와라 일족이 권력을 잡는 확률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황후는 만일의 경우에 임시로 정무를 보거나 황제에 즉위하기 위해 황족 이외에 황후가 없어 나가야왕이 반대할것이 틀림없었으며 729년 나라 시대에 나가야왕을 모반 혐의로 체포하였는데 그가 덕망이 없었는지 도네리친황도 조사를 받은끝에 나머지 친왕들과 함께 자살하였으며 이를 나가야왕의 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지와라 4형제는 전염병에 걸려 차례로 사망하여 버렸고 남겨진 아들들은 아직 젋은 쇼무 천황의 후지와라 씨에게 거리낌없이 전왕족인 모모를 상위에 두고 기비노마키 승려의 글을 내세워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는데 740년 후지와라의 아들인 후지와라 마비와를 추방하라고 큐슈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 다른 후지와라 일족이 동조하지 않아 고립된 처지에 생겼는데 지금의 나가사키 현의 고토 열도까지 도망간 끝에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왜 큐슈에서 반란을 일으켰나 했더니 그 당시 그가 다자이 상에로 다자이후에 부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슈의 다자이후이가 되면서 아무리 서일본에서 조정의 근거지가 되지만 당시로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곳이기 때문에 좌천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후지와라의 난을 진압한 쇼무천황은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놓아 버렸는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헤이조교를 버리고 도시를 만들면서 여행을 다니면서 노는 생황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텐무 천황은 역사서에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천황이라고 설명되었지만 진신의 난에서 행군한 경로와 같은 위치에 출발한 일도 요시노에서 거병한 날과 일치하였는데 오류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텐무천황의 시대를 기억하는 장교들은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고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다양하게 천도한 것도 중국 당나라 시대 삼도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려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도 있으며 실제 발굴조사에서는 3일만에 시가현 오츠시에 건물이 세워져있었다 라던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것은 아닌것입니다.


다양한 불교 신앙 방안을 내놓고 있었지만 741년에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코쿠분지건립조서를 내며 나라마다 코쿠분지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각국에 코쿠가 건조되었지만 무사시나라의 코쿠분지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코쿠분지라는 도시의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대불을 건설한다는 것도 생각하였는데 거대한 대불을 지어 반드시 세상에는 쇼무천황과 후지와라 일족2 평화가 올것이라 틀림없이 생각하였는데 거듭되는 수도천도와  수도 건설에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교는 당나라에서 간진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온것으로 시작하엿는데 지금까지 일본의 불교는 스님으로 결정되는게 미비하였기 때문에 이상한 스님도 많았는데 당나라에서 활약하는 대단한 스님이 와주어 계율을 전해주고자 요청하여 온것이 간진이었는데 불교 사회 사업으로 고묘 고고가 스스로 빈곤문제의 구제에 해당하였는데 시약원을 설치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 약을 주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