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야요이라는 말은 지명에서 비롯된 시대이름인데 야요이 시대의 시작 1884년(메이지 17)년에 현재 도쿄대 농학부가 있는 도쿄 부 혼고 구 야요이 패총에서 문양이 간단한 토기가 발견되어 이를 야요이 토기라 명명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야요이 토기는 죠몽토기와는 달리 변형이 적고 모양도 심플하여 예쁜 그릇형식으로 매끈하였는데 성형기술이 훨씬 위입니다.
당시 이것이 오모리 패총엥서 발견된 죠몽토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황제의 무덤인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일본인의 조상인지 고고학자들은 야요이 시대의 시작 비교 검토 작업에 들어갔으며 결론이 나온것은 토기가 발견되고 무려 60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야요이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도 쌀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 야요이 시대라고 정착되었는데 뼈와 치아의 모양 DNA감정 등을 통해 토기의 뿌리 탐색등의 연구 결과 중국 북동부와 강남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를 통해 서일본에 정착하여 점차 확산해 나갔다고 생각할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야요이 토기가 모두 실용적이며 심플한 디자인은 아니고 예외도 있었는데 야요이 시대의 시작 동북 지방은 계속하여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장식이 다양하거나 조몽시대의 토기와의 차이가 구분하기 힘든 정도의 것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원래 훗카이도는 벼농사를 하지 않았으며 야요이 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몽인의 자손에 의해 계속 죠몽시대에 살고 있었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요이 시대를 정리하자면 중국과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으며 벼농사가 시작되고 금속 도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제사를 모시고 계급과 신분이 생겼으며 전쟁이 치열하게 나왔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 정도부터 조나 수수 경작을 시작했지만 장강 하류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농업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다양한 도구를 개발하고 철기도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농경 생활이 시작되므로 인해 사람들의 정착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고 음식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단결하고 통솔할 수 있는 지도자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도자를 통해 점차 큰 영토를 가진 국가가 탄생하게 되고 음과 서주라는 국가를 거쳐 기원전 3세기에는 진과 한나라 라는 강대한 국가가 탄생되고 있었습니다.
쌀 경작은 서일본을 중심으로 천천히 보급되었는데 죠몽사람들이 대륙에서 온 야요이 인들과 혼혈이 되었는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갑자기 멸종하였는지는 알 수없지만 현재 발견된 인골로 추정컨대 죠몽인은 비교적 울퉁불퉁한 얼굴인데 반해 야요이 인은 비교적 매끄럽고 깔끔한 용모와 평균키도 약 10cm이상 차이가나 상당히 다릅니다.
또한 아시아 전체로 생각하면 한랭지로 갈수록 키 높이가 커진다든가 하는 것이 있는데 일본인의 뿌리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서는 대체설, 혼혈설, 변형설 등의 3가지로 압축되어 치열한 격론이 오가고 있습니다.
야요이 시대에 들어서면서 벼농사가 일본에서 일반화 된 시기이므로 당연히 벼농사를 쉽게 하기 위한 도구가 개발, 보급되었는데 먼저 정착 생활에 대비한 훌륭한 집을 만들 필요가 있어 나무를 베고 가공하는데 필요한 도끼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쌀을 타작하는 나무 절구도 탄생하고 수확물이나 도구 창고로 이용된 죽마창고 등 다양한 형태의 물건이 만들어 졌는데 벼농사만으로는 만족할만큼의 수확량이 나오지 않아 죠몽시대에 이어 사냥과 어업도 같이 이루어 졌는데 수확물을 약탈하는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을 주위에 망루를 건설하고 더 멀리 볼수 있도록 연구를 거듭하였는데 사실상 야요이 시대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의 승패에 따라 패배한 집단을 지배하게 되고 결국 나라가 되었으며 통치자는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오랬동안 세습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나라도 있었씁니다.
사람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생겼으며 야요이 시대를 장식하는 도구로는 동탁과 구리창, 동검등이 있습니다.
제사용으로 만들어진 청동 종과 같은 것을 동탁이라고 하는데 외부에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안에는 동물이나 인물, 가옥등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풍속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동탁이 어떤 제례에 사용되었는지 아직 뚜렷하게 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후쿠오카 현의 유적에서 동탁이 발견되고 시네마현의 고진다니 유적과 그 주변에서 동검과 동탁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발견되어 최근 연구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데 이 지역이 구리 제품을 주조하는 곳이거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있었던 곳은 아닌지 짐작하고 있는데 동탁이 하나님을 모시는 제사용 도구라고 한다면 강력한 왕의 등장으로 하나님 따위 필요 없다고 하여 모두 한곳에 묻어 버렸다는 설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