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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1

by 건강맨1213 2017.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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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종1년부터 선조31년까지 조선 중기의 명장입니다.

본관은 덕수이며 자는 여해이고 고려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의 가문으로서 이돈수의 12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로 변수림의 딸 입니다.


서울 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으며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하였음에도 이순신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으로 큰 공을 남길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 등 지치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고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며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 이요신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이 있어 모두 4형제였으며,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 요,순,우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것입니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 매우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1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재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자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또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 같이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합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다른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깍아 화살을 만들고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1 그것을 가지고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았으며, 또 자라나면서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가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습니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는데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에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이어 함경도의 봉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는데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으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던 차에 호인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딕이 피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처형 당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장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는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을 근거지로 삼아 그 이순신 조선중기의 명장1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선전관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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