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이라는 인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유인석은 1842년(헌종 8) ~ 1915 조선말기의 위정척사론자이자 의병장이며 본관은 고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강원도 춘천 출신이고 아버지는 유중곤으로 14세 때 족숙인 유중선에게 입양되었습니다.
비교적 건실한 양가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주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춘추대의정신에 유인석 조선말의 위정척사론자의병장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철저히 익혔으며, 1865년 만동묘철폐와 1868년 병인양요로 대내외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갈 무렵에 이미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고 강화도 조약 체결 때에는 이러한 존화양이사상을 기반으로 홍재구 등 강원도 경기도 유생 46인과 함께 척양소를 올려 개항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뒤 1981년 김평묵이 유중교가 죽자 이항로 김평묵 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정통도맥을 승계하게 되어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고 그리고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유중교의 기반을 계승하기 위해 1895년 6월에는 그 곳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재기 항쟁을 도모하기 위해 황해도 평안도로 이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안승우 등의 문인사우들과 함께 복수보형의 기치를 듥 1895년 12월 24일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는데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명을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유인석 조선말의 위정척사론자의병장 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들을 처단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습니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으로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싱하였는데 그렇지만 양서지역에서의 재기 항쟁도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도리어 회인현재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어 같은해 7월 28일 혼강에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고 의병해산 후에는 한인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하였습니다.
1897년 3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하였으나 곧 이곳으로 재차 망명하였고 팔왕동으로 이주하여 여러 성현의 영정을 봉사하는 성묘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한인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을 피하여 귀국한 뒤로는 양서지역 각지를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여 이진룡 백삼규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으며 고종의 퇴위와 정미칠조약체결을 유인석 조선말의 위정척사론자의병장 계기로 국내활동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 연해주 망명을 결심하였습니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의 결성을 보게 되었으며 통고13도대소동포라는 포고문을 반포 이상설 이범윤 이남기 등에 의하여 도총재로 추대되었으며 이 직위는 1985년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집요하게 전개해온 항일 투쟁의 공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그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에 해당합니다.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에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벌일것을 주장하였는데 그러나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개시하기도 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조국은 멸망하고말았으며 더욱이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이곳의 항일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하자 13도의군은 와해되는 도정을 밟았습니다.
그 자신도 연해주를 떠나 1914년 3우러 서간도의 봉천성 서풍현에 정착하는 제3차 망명을 단행하였고 이에 무력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모든 지사와 사우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하여야 한다며 수화종신할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로 옮겨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일관하여 위정척사 존화양이 정신에 입각 철저하게 수구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적극 항일하였고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 발전시켰으며 이항로가 개항 이전에 관념적 위정척사론을 펼쳤던 데 비해 개항이후에 현실적 위정척사론을 전개시켰기 때문에 의병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1902년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된 소의신편에 결집되어 있으며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