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있는 양반마을에 관한 내용입니다.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국가민족문화재 제188호이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있는 민속마을입니다.
내용 국가민족문화재 제 188호 망르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에 자리하며 해안에서 9키로거리 해발 125m의 비교적 높은곳에서 위치하며 이곳은 1423년세종5에 현청이 설치된 이후 한국의 양반마을 제주 성읍마을 조선말까지 약 5세기동안 정의현 소재지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읍성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성광과 동헌이었던 일관헌 및 명륜당 대성전을 포함한 향교가 있습니다.
기타건물로서 객사향청무학청진무청가솔청작청현사사창서별창군기고대동고평역고형옥남성루의두정한동루남대문동서대문등의 건축물이있었다.
이들 건축물들은 대개 이 고을의 풍수지리적 해석은 다음과 같으며 그 위치정도만 알려져 있으며 그것의 규모는 전해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향교건물을 볼때 제주도 특유의 평면구성과 구조 기법을 지녔으리라 추측됩니다.
제주도의 영봉인 한라산을 조산으로 삼고 고을 북쪽의 수려한 영주산을 진산으로 남족들판가운데 남산봉을 안산으로 삼으며 형국안에는 천미천이 반달꼴로 흐르고 그 반달의 안쪽에 읍성이 있으며, 남산봉 남쪽으로 수구가 열립니다.
고을의 형국은 크게 보면 장군대좌형이고 작게보면 행주형이되며 장군대좌형이란 장군이 마주않아 있는 형상이라는 뜻으로서 앞뒤 좌우대칭형 자세를 말합니다.
벙어에 대단히 유리한 분지임을 의미하고 이곳에서는 배에서 가장중요한 키나 돗대 닻을 갖추어야 길하다고 생각되며 행주형은 우리나라 고을의 터에 주로 쓰이는 지세로서 한국의 양반마을 제주 성읍마을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막 떠나려고 묶어둔 배란 의미입니다.
이런 형태의 당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부하게 모인다고 믿으며 이곳에 우물을 팠을때에는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난 것과 같이 흉하다고 믿습니다.
이마을의 닻은 남산봉에 해당하고 돛대는 마을의 큰 나무가 그 구실을 한다고 전하며 또한 같은 이유로 마을안에는 일체의 우물을 파지 않았으며 대략 250보이며 성곽은 가로로 60첩 세로 50첩으로 계획되어있으며 고을은 분지의 가운데에 자리잡았는데 지세가 약간 도드라진 듯한 곳에 위치합니다.
성곽의 크기는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고을 중심적인 객사 대문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으면 이 축선은 고을의 남쪽 능선인 갑선이오름과 아심선이사이 처진곳을 향하는바 북쪽 성벽의 의두정과 남대문 위를 지나며 동서로 그으면 서대문과 동대문을 지납니다. 동헌은 북쪽중심인 의두정에서 서쪽으로 15도를 튼 축선위에 위치하며 그 사이로 저 멀리 남쪽의 표선리에 있는 매봉이 등성이 너머로 엿보입니다.
이것을 규봉이라 하여 풍수에서는 대단히 흉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도록 등성이에는 커다란 성곽 모양의 규봉막이를 하고 남문앞에는 액막이인 거북대를 만들어 두었다고하며 도로의 모양은 성곽 밖의 경우 평지 마을에서 자주 쓰이는 둥근고리꼴 길을 만들고 성곽안에는 고을에서 보통 쓰는 우자꼴 길을 기본으로 삼으며 우자의 에는 고울에서 가장 중요한 관아를두고는 동서길이 되며 남문로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근간으로 활꼴길과 한국의 양반마을 제주 성읍마을 막힌 도로를 배치하여 고을의 도로망을 구성하고 마을 전체에 고르게 집들을 배치합니다. 이것은 산림경제 복거조의 똑바로 오는길은 충파라 일러서 좋지않으니 반드시 구부리고 굴려야한다 길들은 모두 활처럼 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모임장소는 대개 길들이 만나는 곳에 마련되며 여기에는 큰 나무가 있고 걸터앉을수있는 평상이 마련되며, 여기에서 이름난곳은 동헌 앞의 공문동산벌원방죽동문 앞 노다리방죽등입니다.
민가입구의처리는 일반적으로 짧은 올래는 집들이 밀접해 있는 도시형 주거에 많이 이용되고 짧은 올래를 두고 대문간을 시설하며 길 안쪽에 잇는 집들은 긴 올래를 쓰고 대문간을 두지 않습니다. 긴 올래는 농촌에 많이 보이는데 이곳은 짧은 올래를 가진 집이 비교적 많은 도시형 마을입니다.
민가는 기록에 의하면 거의 다 타버렸다고 전해지며 1826년 순조 26년 성 안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800여동이 불탔다고 전하고 1948년 43사건때 따라서 오래된 주택이 없을듯 싶지만 실지 19세기 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아직 그 이전의 건물도 꽤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기술로 말미암아 육지와는 다른 한국의 양반마을 제주 성읍마을 건축기술을 발견할수 있으며 평면은 겹칩이며 안거리와 밖거리 2채를 중심으로 배치방식은 모로 앉은 모양 두가지가 있는데 마을에서는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가옥 5채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욱 우세하며 안거리의 방위는 정남쪽이 월등하게 많으며 다음은 동남쪽과 그 사이가 차지합니다.
기타 지방문화재로는 민간신앙도 다양하여 안할망당 산신당 상궁알당 등 무속신앙처가 아직 남아 있고 동제인 포제를 치를 때 목동신을 더 불어 모시는 것도 특이합니다 걸궁도 근래까지 전승되었으며 특이한 민요도 전승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