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교주 손병희의 2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우리 도는 후천개벽의 도라, 후천개벽은 손병희 동학교주2 인심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천도를 잘 행하는데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용구등 친일 배교분자들의 매국행위를 보고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월 16일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에 설치하였는데 이미 천도교를 선포할때 오세창등을 6임소에 임명하였고 자신은 대도주의 직무를 겸무하며 교도를 설교하고 일요일을 시일이라 정해 시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나 이용구는 말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여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한 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 처리하던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을 내렸습니다.
이에 정교분리를 내세워 오직 종교활동만을 전개하기로 하였고 이들은 손병희의 망명기간중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 했기 때문에 부동산 동산이 그들의 명의로 되어있었고 당면한 손병희 동학교주2 재정난은 교도들이 한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의 재정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였습니다.
1911년 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시키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으며 1914년 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1운동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천도교에서 쫒겨난 이용구 손병준 등 친일파는 시천교를 만들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폈고 이에 비해 천도교는 교세도 약화되었고 재정도 궁핍하였으며 손병희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의 직을 김연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연국은 대도주의 직을 지닌채 평소 비난하던 시천교의 대례사에 취임하였고 손병희는 박인호에게 대도주의 직을 맡게 하였는데 일본망명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손병희 동학교주2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제일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 광명소학교 석촌동소학교 등에 정기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하였고, 문창보통학교에도 관계하였습니다.
또한 이 박에도 지방에서는 대구의 교남학교 일신보통학교 청주의 종학학교등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을 돕고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였습니다.
1914년 말에는 동덕여자의숙의 경영권도 인수하였으며 또한, 최석창 민건식 등의 도움을 받아 출판기관으로 주식회사 보문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설은 사기사건에 연류되어 경무총감부에 계류되었고 초사동 중앙교당 손병희 동학교주2 옆에 창신사를 설립해 천도교월보 제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해 보성사로 하고 시설을 확충하였습니다.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난이 심각했지만 일진회의 활동을 금지 시천교도 급속도로 약화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였는데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건립에 진력해 천일기념일 지일기념일 인일기념일의 3대행사에는 시일식을 마치고 축연을 베푸는등 더욱 활발하게 활동 대안동 손병희 동학교주2 중앙교당이 성립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일제의 탄압이 더욱 혹독해져 갔지만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으며 천도교측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에 이미 천도교도 중 민중봉기를 건의한 신도가 있었고 권동진 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 권동진 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 최린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하고 일원화해야하며 비폭력적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고 손병희 동학교주2 구체적인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에게 일임하였는데,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천도교 직영의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고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치료하엿습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