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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by 건강맨1213 2017.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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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생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1342충혜왕 3 ~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입니다.


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 호는 삼봉 봉화호장 정공미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이며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입니다.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이며 아버지와 이곡의 교유관계가 인연이되어 통례문지후를 역임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윤소종 등과 교유하였습니다.


문장이 왕양혼후해 동료 사우의 추양을 받았으며 정도전 공민왕9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후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 전교주부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으며 이듬해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을 관장하였으며, 우왕1년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배 명정책에 반대해 북원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관하의 거평부곡에 유배되었습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 삼각산 밑에 초려를 짖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왕모라는 재상이 별업을 만들기 위해 재옥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습니다. 


9년간의 걸친 간고한 유배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가서 전교부령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해 성균좨주 지제교 남양부사를 역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건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1389년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삼사우사 지경연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 이초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김진양 서견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불명하다 든가 천지에서 기신해 당사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 풀려나와 같은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번째로 같은해 7월에 조준 남은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개구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겸판상서사사 보문각대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습니다.


태조2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등 3편의 악사를 지어 바쳐 이성꼐의 창업을 찬송하였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1394년에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경상전라영광삼도도총제사가 되어 재정 및 지방병권을 장악하였는데 같은해 6월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고 이해 심기리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습니다.


1395년 정총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37권을 정도전 지어 올리고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 감사요약을 저술해 전라도 관찰사 이무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밝혔으며 1396년이른바 표전문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적극추진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군도를 밝히고 12우러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를 획정 성보를 수선하여 참호를 설치하였으며 1398년 권근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들에게 경사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을 저술해 배불숭유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는데 죄명은 세자 이방석에 당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으로 이를 공소난 무인난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정도전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를 박람해 의론이 정연했따하며, 개국과정에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 약간 명을 상복받았을뿐 자신의 위치를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랬동안 유배 유랑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는데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의 후예로서 아버지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차씨 공윤의 외예 얼속이었으며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있었습니다.


이런 혈통때문에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정도전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고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러서 정착시켜 사상 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되었습니다.

시호는 문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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