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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 마을 조선시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by 건강맨1213 2017.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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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서 경상북도 경주시강동면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내용으로는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이 경주양동마을조선시대경주시강동면양동리 마을은조선시대초기에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와여강이씨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습니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 의외 가로서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하며 손 이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마을의대소사에 협동해 오고 있습니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키로미터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로 안은 지형이며 이역수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서편에서는 실제로 부의 상장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이양씨였으므로 역수의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은 옛날에는 술야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 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공급이 불편없이 이루어져있습니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며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마을이라고 불렸습니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에서 장태사로 조선시대에는 경주 양동마을 조선시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유복하에서 손소로 다시 이번으로 계속해서 외손쪽으로 계승되어왔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며 그때부터 양좌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며 손소는 1459년세조5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함경도길주이시애의난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경주 양동 마을 조선시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되었습니다.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에 한편손소의 딸은 여강이번씨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전하며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 맏이가 동국18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고 있는 이언적이었습니다.

그는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10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에게 훈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언적은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양산김해상주등 외삼촌의 임지로 따라다니면서 수학을 하였으며 24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러한 이연적의 수학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을 낳게 하였습니다.

손씨측의 주장과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씨측의 상반된 주장이 두 가문사이에있어 온 갈등의 우너천이 되었다고합니다.


이러한 대립괸계는 마을내의 몇개의 정자나 일반 살림집의 배치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마을의집들은 미음자형이 기본형으로 거꾸로 자형으로 뻗은 그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배열되어있습니다.

그 배치가 듬성하고 능선마다 우거진 숲이 있어 접근해야만하는 모습이 드러나는경우가 많으며, 1979년의 보고서에는 대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그 아래로는 직계또는 방계손들의 집자리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마을의 가옥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중요민속자료로는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16세기창건과 보물 제442호인관가정16세기창건보물제412호니 향단이 있습니다.

월성손동만씨가옥양동이동기가옥양동이향정양동강학당 등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주택의 건축규모는 대략 50평내외이고 방은 10개내외이며 대지안에 사당을 모신 대종가와파종가는4가구입니다.


이들 대규모 주택들에는 원래 한 집안에 데리고 있는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인 가랍집을 3,4채씩 거느리고 있으며 광복때 까지만 하여도 경주 양동 마을 조선시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가랍집이 4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텃밭으로 변하였고 이따금 잔존하는 초가는 이미 거주자가 바뀌었으므로 과거의 상대적 신분관계는 해소된셈입니다.


정자는 5월그믐에 개장되고 보신탕등 음식과 시창으로 양로위안의 예를 갖추었다고합니다. 

절후로 보면 유두초복중복말복칠석입추처서등이며 지금 친족간의 협동과 유대는 주민들의 빈번한 도시 진출 때문에 점차 감소되는 상황입니다.


상조계는 손이양씨의 계조직은 손이타성바지등 문중이나 파손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협동의 비중은 경주양동마을조선시대경주시강동면양동리 상례혼례제례회갑생신돌백일등의 순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경주 포항 대구뿐아니라 부산 서울 등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동족간의 단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819년 양동이호수는 91호였으나 양좌동초안에 기록된 1973년에는 165호 1979년에는 151호로증가와 완만한 감소를 보여왔습니다.

이마을은 아직도 유색이 짙은것이 하나의 특색이며 손이양시의 호구관계는 이씨들의 호수가 많습니다.


그러니 인근의 강동면과 경주시 전체를 본다면 손씨후손들이 더 많다고 하며 현재 월성손씨의 종손인 손동만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입니다.


과거 마을 전승으로서도 동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세시행사로도 삼복후의 머슴놀이인 호미씻이와 2,3년에 한번식 행하여졌던 정월대보름, 추석 전 후의 줄다리기등이 고작이었던것도 하나의 특색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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