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역사에 대한 내용 2번째 입니다.
기타전각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크기는 19평으로 고종10에 담화대사가 옜 금탑전 자리에 신축하고 현재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경상남도 웅천의 성흥사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으며 지금 건물은 고종10에 지어졌습니다.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자운스님에 의해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서원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때 대장경판전을 합천해인사 조선의사찰2 신축하기 위해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음전은 심검당이라고 불르기도 하며 내부에는 천상궁의 시주로 중건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 연대는 알수 없으나 현재 건물은 1908넌 회광이 현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청므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 성종19 학조대사가 창건하여 역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인데 현재 건물은 성안대사가 중건한 것입니다. 소조 석가여래와 1918년에 판전 서재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은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는데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고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때 선객들이 드세다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목조 희랑조사상을 보장전으로 현재는 방장 부속실로 사용하는 구광루로 옮기고 이듬해에 해인총림을 설치하여 영정을 모두 경학원에 봉안하고나서부터는 다시 상선원으로 사용하다가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1817년에 모두 불탄 적이 있어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습니다.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합천해인사 조선의사찰2 수행정신을 간직한 의미가 특히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떤 점에서 역사적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궁현당의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의 교사로 사용되고 선불장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구광루는 1818년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건립되었으며, 크기는 67평으로 본래는 재식시 법요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동쪽 한칸은 종고루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학원은 경홍전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 민형탁의 뜻에 의해 삼전위축소로 건립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안치실로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읻매후벝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셔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합천해인사 조선의사찰2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는데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고 하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운당의 크기는 146평으로 창건연대는 알수 없으나 149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으며 몇차례 중수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중수된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로 사용되고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범윈대사가 사중에서 중수하였습니다.
봉황문은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이 안치되어 일주문은 건리되었습니다.
기타문화재로는 이밖에 해인사의 성보로는 합처 해인사 길상탑 금은자사경 세조영정 해인사 석등 상탑향로 무공수정옥등잔 진주등 순은화병 관욕소관 오동향로 순은다기 급산첩 방울 대종 소종 합천해인사 조선의사찰2 화초수병 귀형촉대 관복 삼보인 숙종어필 팔상병 33조사영병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떤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 선수 희언 각성 등이 있으며 사상적인 맥을 따질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문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