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김제시금산면금산리모악산에있는 절에 관한 내용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제17교구본사금산사 사적에 의하면 600년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에 쓴 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불연이 있음을 강조한것입니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금산사 조선의사찰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으며,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더나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습니다.
경덕왕 21에 시작하여 혜공왕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주불로 모셨고 금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 유식슬기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들을 간행하였습니다.
진표의 석련대 오층석탑노주 중창 이후 후백제 견훤의 금산사 조선의사찰 그러나 선조31 보호를 받아 부분적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이 1079년 문종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절은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법상종 관계장소들을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잇으면서도 법화현찬 유식슬기 등을 간행하였습니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그의 노력으로 광교원을 설립하여 강경법석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금산사는 규모가 큰 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598년선조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수문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인조13 낙성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떤 승려는 화엄대법회 지훈덕행석준천정응원학련태전운근등이었습니다.
영조1금산사에서 낙암이 화엄대법회를 열었습니다. 고종때에는 총섭으로 취임한 용명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 대장전대적광전 등을 보수하였고, 성렬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상문 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방등계단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유식학의 대가 해원등이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룡도생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금산사 조선의사찰 임진왜란 때 승병 천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과 서산의 선지를 이어받았던 태능 편양파의 후계자인 남악태우등이 머물렀습니다.
또한 포광이 지은 화상 또는 사주라고 불렸고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습니다. 총섭 섭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 봉천원 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 재건되었으며 나머지 사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 전해집니다.
근년에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유물로는 보물 22호인 월주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약 500미터 밖에 위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 보제루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승당 서전등의 건물을 중수또는 중건하였습니다.
보물 제 23호인 김제 금산사 석련대 보물 24호인 감산사 혜덕왕사탑비 오층석탑 금강계단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김제 금산사 당건지주, 김제 금산사 석등 보물 제 827호인 김제 금산사 대장전 등이 있습니다.
이 중국보 제62호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잇는 철수미좌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입니다. 신라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형태로 보아 금산사 조선의사찰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적광전은 1922년 복원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 수계 설계 설법 등의 법요를 진행 했던 곳으로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인조13년에 중건하여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화재로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 목탑이고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제자상이 봉안되어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과 보주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