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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by 건강맨1213 2017.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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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있는 하회민속마을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정의 경상북도안동시풍천면하회리에있는 민속마을 입니다. 

내용은 중요민속문화재제122호로 조선전기이후의 전통적가옥군의 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존재와 영남의 명기라는 풍수적 경관과 어울려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등이 현대공업사외에서 매우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전통적경관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존발전이라는 그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전체를 동남서방향으로 감싸도는 명기이고 차원에서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하회마을은 풍산유씨 동족마을이며 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그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연꽃이물에 떠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전에는 대체로 허씨안씨등이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왓을것이라고 추정중입니다.


1635년 인조13의동원록에도 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삼성이 들어가있기는 하지만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이라 많았던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이 짐작됩니다. 


유씨의입향조는 8세 종혜로 알려져있지만 유운룡은 시조에서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동생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서애파로 부르기도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 은 중흥조유운룡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것입니다.

이 마을에서는 유서깊고 규모가 큰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유씨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수 있으며,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을을감싸도는 화천은 낙동강상류이며그둘레에는 퇴적된 럽ㄹ은 모래밭이 펼쳐지고있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이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강류의 마을쪽이 백사장인데 반하여 건너편은 급준한 층암절벽의연속이어서 여러정대가자리잡고있어 승경으로서의면모도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강류의 북쪽대안에서는 이곳 자연의 으뜸은 부용대의 절벽과 옥연정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가는 즈음에는 겸암정과 상봉정이 자리잡고 있어 일련의 하회명구를 이루고 강의 최대폭은 대략 300미터이며 최대수심음 5미터이고 나룻배가 교통수단 강건너 인근과 과거에는 음력7월보름에 시회가열렸는데 부용대밑에서 유명한 줄불놀이가벌어졌습니다. 


이강상유화의 놀이에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고장의 오랜민간전승놀이이며 별신굿에 쓰던 가면들은 국보로지정되고 그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청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배경의 뿌리깊음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요민속문화재로는 하회북촌댁하회원지정사하회주일재하회빈연정사하회풍산류씨작천댁하회옥연정사등이지정되어있고 지정가옥들은 모두 유씨집안소유입니다.


그중 규모로보나 유래로보나 제일 큰것이 두 정사를 제외한 가옥들은 모두 미음자형몸채를기본으로하고 영진당충효당북촌댁남촌댁옥연정사겸암정사등을 꼽을수 있습니다.

몸채의 한편을 길제 연장하여 사랑채를삼고 그러나 북촌댁은 사랑채를 길게 달아내지않고 그대로 사랑방을 수용하여 한편 옆마당에 따로 큰별당을 지어 사랑방공간을 확대 보완하였습니다.


양진당의안방은칸반통으로3칸을잡았으며그러므로안대문채와일자로뻗은사랑행랑채를들어서면매우 넓은 사랑마당을 건너 사랑대청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양진당은 사랑채를 몸채의 오른편 윗머리에서 달아내어 안채의 대청끝과는 복도러서 연결하였으므로 안채보다 오히려 뒤편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완충공간으로서의 토방이나 중문을 두지않고 직결시킨 형식은 매우특이합니다.

양진당이 남향집인데 반해 충효당은 서향집이며 솟을대문은 바로 사랑대청전면에 세워져있고 사랑채에서 안채 출입을 할때에도 양진당과는 달리 대청뒤토방에서 내려서서 안사랑부엌으로 통하는 중문을 지나게 되어있습니다.


충효당에서는12칸의긴줄행랑이잇는데이곳에서는 유일한 예이거니와이처럼 칸수가 많은 행랑은 영남전역에서도 보기드문것입니다.

후원에 부설된 영모각은 소규모의박물관으로 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중흥조이자 임진왜란때의고인인유성룡의교지문서등의 유품과 그에 관계되는 명나라장수들의서화등 여러문서와 서적들이 보관전시되어 있습니다.


북촌댁의대문채와 담장은 매우높아서 위압감을주는데 사랑방과 사랑대청은 규모가작은편이지만이를보완하는 큰규모의별당이 사랑채옆에세워져있습니다.

한편남촌댁의별당은규모는작으나 작은연못을 두고 대와 매화를 비롯한 여러 초목을 가꾸어 후원별당으로서의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가옥전체의 맨 안쪽에 위치한 사당채의 동편후원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별도의담장을 둘러서 외부와의 공간을 차단하고 있어 발당채로서는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안채와사랑채는 1953년 모두소실되어서사랑채 터 앞에 옛정자 한채만 복원되어 있을 뿐입니다.

위 네가옥은 이미 이마을의 모든 가옥을 대표할만한 역사적 유래나 문화적생활공간을 조선시대 안동 하회 민속마을 여유있게 갖춘점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이밖에 여러 대소가옥중에는 주거사적인 가치를 지닌 예입니다. 


소규모의 순전한 토담집과 봉담집은 기본적 건축재료인 진흙만으로벽체를 쌓아올리는 원초적 민가축조기법을보이고있습니다.

이러한점에서 위 네가옥의 목조구조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면서도 건축문화의 다양한 일면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은과거신분제사회에 있어서 반상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 들 인 것이며 이 마을이 당면한 문제는 산업화에 따르는 이농과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 빈집의 증가와 가옥의유지관리의곤란함 가옥의 퇴락소멸경향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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